라면의 유해성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라면의 유혹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라면에 얽힌 추억 하나쯤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저마다의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어 놓는 묘한 재주를 가진 라면 한 그릇은 2008년, 우리 앞에 어떤 의미로 놓여 있을까?
라면의 탄생 그 후, 얼큰한 역사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돌아본다.
서민의 운명을 타고난…
반만 년 동안 쌀을 주식으로 해 온 우리나라가 세계 으뜸의 라면 소비국이 되기까지… 그 지나온 세월 속에는 참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보릿고개가 지나가고 김치찌개 백반이 30원이던 1960년대, 10원짜리로 태어난 라면은 5원짜리 꿀꿀이죽에 비해 훨씬 포만감이 들게 해 주는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오래도록 쌀밥에 길들여진 입맛이었지만, 라면의 얼큰한 국물 맛은 한국인들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 시절, 미국의 밀가루 원조와 함께 진행되었던 ‘라면 권장 캠페인'도 우리 입맛을 길들이는 데 한몫 크게 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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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오늘날 ‘1인당 라면 소비량 세계 1위, 대한민국'의 라면 사랑의 시작은 단지 가격이 저렴해서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가격의 경쟁력, 맛의 경쟁력, 그뿐 아니라 조리하기도 참 쉽다. 이 모든 장점 덕에 최근 우주 식량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라면….

그런데! 그 라면 값이 올랐다. 서민의 운명을 타고난, 그래서 서민들의 가벼운 장바구니를 알뜰하게 채워 주며, 불황에도 잘 팔리는 대표적인 ‘불황지표 상품'으로 꼽히던 라면 값이 또 한번 올랐다. 밀가루 값 인상과 함께 라면 100원 인상 계획이 발표되자 대형마트에서는 하루 판매량의 두 배나 많은 20만 개의 라면이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빈부귀천 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스피드가 필요한' 현장에서 라면을 찾아 댄 사람들은 결국 서민들이었으니…. 물 건너온 이 음식, 라면 한 그릇의 가치가 조금은 더 새롭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라면 탄생의 운명적 그 순간…
라면의 시초에 대해서는 크게 ‘중국 유래설'과 ‘일본 유래설'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세계 최초 인스턴트 라면 왕'의 눈물겨운 라면 개발 스토리는 바로… ‘일본 유래설' 속에 담겨 있다. 그 주인공은 지난해 세 상을 떠난 일본 닛신식품의 회장, 안도 모모후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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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한 폐허의 일본 땅에서 식량 기근에 시달리던 일본인들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그의 집념 어린 새로운 식품 연구가 시작되었다. 값싸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식품을 개발하겠다는 한 가지 목표!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면발을 주 재료로 정한 그에게 놓인 최대 과제는, 장기 보존을 가능하게 해 줄 ‘면발 사이의 작은 구멍 만들기'였다.
계속되는 실패에 한숨이 이어지던 어느 날, 술집에 들른 그는 우연히 어묵을 기름에 튀기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것이 바로 라면 탄생의 운명적 순간! 밀가루 반죽을 묻힌 생선을 끓는 기름에 집어넣자, 밀가루 속에 있던 수분이 순간적으로 빠져나오면서 밀가루 반죽에는 무수한 작은 구멍들이 생겼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과학이 그러하듯 이 우연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오늘날 따끈한 라면 한 그릇의 여유는 우리 앞에 놓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1세기 베스트셀러, 라면의 운명…
현대인들에게 잠시 쉬어 가는 여유를 전해 주는 라면! 이 음식의 고민과 목표는 단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단순하고도 뜻 깊은 목표와 함께 1960년대 우리나라에 등장한 라면은, 1970~1980년대 최고의 전성시대를 누린다. 이 시기 라면의 연간 판매신장률은 30~40%대에 달했으니… 실로 성공적인 스타 식품의 등장이었다 할 수 있다.
판매 초기였던 1960년대 후반 연간 생산액이 1,500억~1,600억 원대였던 것과 비교해 작년의 라면시장 규모는 1조 4,440억 원! 화려한 등장과 더불어 꾸준한 인기마저 누리고 있는 음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989년의 ‘우지파동'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웰빙 열풍 등으로 라면은 심각한 정체기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열량은 높지만 비타민과 무기염류가 거의 없다'는 지적과 함께, ‘체내 칼슘을 빼앗는 나트륨 함유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까지….
인스턴트 라면의 유해성 논란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건강 저널리스트 이마무라 고이치는 ‘인스턴트 라면은 20세기 식품업계가 낳은 최고의 걸작이지만, 동시에 21세기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식품'이라는 경고를 남기기도 했다.
전 세계 한해 소비량 860억 개에 달하는 21세기 베스트셀러 중 하나! VS 그러나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운명!? 이것은 결국… 가까운 일상 속에서 라면의 유혹을 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차마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는 운명이기도 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낭랑 야릇한 음성으로 툭 던졌던 이영애의 대사다. 라면과 함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라면의 추억과 함께 끝이 나는 그들의 사랑….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그땐 너무나 애틋하던 첫사랑과 나눠 먹었던 한 그릇의 라면 속에도, 그리고 한 끼의 배고픔을 견뎌 내는 것이 중요했던 시절 허겁지겁 먹어 치우던 가난한 시간의 라면 속에도… 거기엔 단지 기억을 넘어서는 ‘추억'이 담겨 있다.

추운 겨울,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찾아갔던 허름한 라면집의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 라면으로 채워졌던 무엇…. 그리고 어느새 피어난 길가의 꽃들에 싱숭생숭해지는 이 계절에 또 한번 찾게 되는 라면이 채워 주는 그 무엇….
라면은 뱃속의 허기만을 달래 주는 게 아니었던 듯싶다. 삶의 허기를 느낄 때 다가오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온기! 어쩌면 그것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라면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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